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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슨노트/life stroy (일상끄적)

우리, 드라마 말고 예능을 찍자

by hehebubu 2015. 8. 3.

​나는 목회자 사모가 아니고, 그저 교회의 충성된 일꾼을 애인으로 두고 있는 20대 여대생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사모 증세' 비슷한 뭔가를 앓고 있었다는 걸 오늘(교제한 지 631일째)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주말 데이트를 마치고 버스를 타러 가는 건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지만, 나도 모르게 '빵' 터진 울음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애인은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당황하고 놀라서 다정하고도 조심스럽게​ ​​'힘든 게 뭔지, 무엇에 화가 난 건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애인도 놀랐지만 나도 못지않게 당황스러웠다. 다음 두 가지가 머리를 지끈지끈 쑤셔왔기 때문이다.

1) 나의 슬프고 어두운 면모까지 보여주기는 싫다구

속은 썩어 문드러져도 애인 앞에서만큼은 밝게 웃어주던 나였다. 왜냐하면 애인은 나 말고도 신경쓸 일들이 천지니까. 세상 천지가 다 스트레스인데 나라도 안식처가 되어주고 싶어서.
오늘도 그럴 계획이었다. 저녁 내내 힘들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었는데, 그만 눈물이 터져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 안엔 우울이 있다.
힘겹고, 익숙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울먹이며 정리 안 된 감정들을 끄집어냈다. 애인은 진지하게 듣고서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동시에 확고하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바빠서 자기 힘든 것도 모른다면 우선순위가 잘못된 거야. 우리는 한 몸이야. 자기가 힘들면 나도 힘들어.​ 내 우선순위는 '자기'야."
애인의 가치관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한 몸'이란 단어는 다소 꺼림칙했지만.. 나랑 '한 몸'이 되고 싶거든 장가부터 오시지요?!)
일반적으로 연인 사이에서, 여자에게는 남자친구가 자연스레 '삶의 1순위'가 되지만 남자는 '잡은 물고기 밥 안 준다'고 애정 표현이 연애 전 혹은 초반보다 뜸해지는 게 사실이다. 깨어지는 것도, 이렇게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이밍을 이해해주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자신의 감정을 그때그때 ​​​ 표현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여자의 서운함 표현이 남자에게는, 또 하나의 부담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재설정하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애인이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자기한테 소홀해졌다 싶으면 그때그때 알려줘. 안 그러면 자칫 일에 정신이 팔릴 수가 있어."
정혜영은​ 저녁 6시만 되면 남편 션에게 전화를 건다던데, 상당히 현명한 방법인 것 같다. 나중에 써먹어야지.
여자는 실은 희생정신이 강하다. 남자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사소한 감정쯤 지그시 즈려밟는다. 우리네 한국 여인들은 유교적 문화 때문에 더 그랬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니' 말 없이 그저 남자가 자기 속마음을 알아주기만을 바랐다. 그렇지만 남자가 독심술사도 아닌데 어찌 여자의 마음을 읽으리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는가. 내 맘을 몰라준다고 남자를 탓하기보다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해지자. 그러면 남자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세심한 감정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할 것이다.
애인도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상처는 약을 발라줘야지 그냥 내버려두면 곪아서 결국엔 터져. 여자로서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나눠주어 고마워."

2) 난 감정 하나 컨트롤 못 하는 철부지가 아니라구

남도 아니고 자기 감정 하나 컨트롤 못 하는 건 유치하다고 생각했었다. 어른이라면 모름지기 감정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하며, 그게 바로 어른과 아이의 큰 차이점이라고 여기고 자부하던 나였다.
그러나 내가 감정 컨트롤에 능숙하다고 생각했던 건 큰 오산이었다. 오히려 감정 컨실에 능숙하다고 하는 게 더 맞았다. 컨실러로 피부의 트러블을 감쪽같이 감추듯, 남들 앞에서 감정을 숨기는 것은 내게 퍽 쉬운 일이었다.​
​​
눈물이 흐르자 가장 먼저 든 의문도 '​내가 이렇게 소심했었나?'였다.
그래, 난 생각했던 것만큼 쿨하지 않았다.
왜 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지?
​​첫 번째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참았다. 때론 공부와 집안일을 잠시 손에서 떼고, 또래 아이들처럼 놀고 먹고 쉬고 자고 싶었다. 그러나 난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첫째니까, 유일한 딸이니까, 게다가 막내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까,​ 내게 거는 부모님의 기대가 커서 맘속에 불쑥불쑥 드는 감정을 억눌러야만 했다.
설령 큰맘 먹고 서운했던 점들을 말하더라도 엄마가 '그럼 내가 사라져주면 되겠네'라고 응수했던 탓에,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상대방과의 이별을 감수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상대(부모, 동생, 친구, 선후배, 혹은 애인)​​​가 행여 ​날 떠날까봐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어린 나의 눈에, 우리 집 부부싸움은 아빠보다도 엄마의 분노조절장애(외상 후 격분장애) 때문으로 비춰졌다. 자연히 나는 어려서부터 화목한 가정을 꿈꿨고,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겠다고 은연 중에 다짐한 것 같다. 특히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 남편이나 심지어 후에 알게 된 하나님 앞에서.
세 번째로, 대학 시절 내가 속했던 기독교 동아리에서 감정을 도외시했다. '감정'은 '사실'과 '믿음'에 저절로 따라오는, 그다지 중요치 않은 개념이라고 가르쳤다. 물론 이는 구원에 있어서 감정에 의존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이성적인 내가 자매들의 롤모델이 되었고, 나는 뿌듯한 나머지 감정을 더욱 외면했다.
이것들이 모이고 쌓여​ 내 안의 쓴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누구보다도 감정에 민감해야 한다. 기분이 안 좋다면 이를 주관한 게 성령인지 악령인지 정확하게 살핀 후, 만약 전자(ex. 죄에 대한 분노,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슬픔과 긍휼)라면 기도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찾아야 하고, 반면 후자(ex. 미움, 시기, 질투, 섭섭, 실망, 우월, 열등, 원망, 자책, 과로, 과식, 과욕)라면 회개로 예수님의 보혈에 깨끗이 씻어야 한다.
이야말로 ​진정한 감정 컨트롤이리라.
애인이 흔쾌히 도와주겠다니 참 감사하다.
내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애인에게 말했다.
"나는 있잖아, 속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툴러."
애인은 언제나 그랬듯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괜찮아. 이제 시작이야. ​우리, 이제부턴 드라마 말고 예능을 찍자. 자기가 좋아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20150801 written by her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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