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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슨노트/sermon note (설교노트)

[오륜교회] 부활 가장 큰 기쁨

by hehebubu 2015. 4. 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3-4)

<부활의 신앙>

예수님을 믿고서 많은 두려움이 해결되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두려움이 있다.

나는 지인이 세상을 떠난 경험이 없어서인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좀 심한 편이다. 아니, 내가 죽는 건 상관없는데 오히려 기대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게 두렵다. 특히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최근 세월호나 크림빵 사건 같은 각종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은 나를 극도의 두려움 가운데로 몰아넣는다. 헤이슨이 날 집에 데려다 주고 수원 가는 버스에서 변을 당하는 건 아니겠지? 올여름 단기선교 가는 비행기에서 변을 당하는 건 아니겠지? 출퇴근하는 자전거에서 변을 당하는 건 아니겠지?

인간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크리스천이라면 이런 두려움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곧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에게 종 노릇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기 죄 때문에 자식이 죽어 가는데도 죄책감으로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아이가 죽은 후 다윗의 반응은 더욱 놀랍다. 그는 아이가 죽었으니 왜 금식하겠느냐며 여호와께 경배하고 결과에 순복한다. 이러한 신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믿음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리라. 아이를 살리기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결과에 대한 실망과 앙금이 그에게는 없다. 하나님의 생각이 언제나 자신의 생각보다 높고 크심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반응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했던 7일간의 기도 덕분이었을 것이다.

게리 하버마스는 당대 최고의 무신론자 앤터니 플루와 '예수의 부활'을 주제로 한 공개 논쟁에서 당당히 압승하여 심사위원 및 방청객을 그 자리에서 개종시킨 위대한 신학 박사이다. 후에 아내가 위암으로 죽어갈 때에도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그 고뇌와 낙심을 극복했다.

헤이슨도 다윗과 하버마스만큼이나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이나 친구가 죽어도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크리스천의 죽음은 死일 뿐 亡이 아니라는 것.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배우고 싶다.

인간은 누구나 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부모님이 아담의 후손인지라 이 생명은 필연적으로 죄성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다. 유일하게 완벽하게 해결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즉, 죄를 전혀 짓지 않으셨으며 부활함으로써 죽음을 이기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죄성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받는다. 이를 새 사람이라고 하며 이와 대비하여 거듭나기 이전을 옛 사람이라고 한다. 크리스천은 새 사람을 입었으나 옛 사람도 완전히 벗을 수 없기에 이 둘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성령을 따르려는데 육신이 거역한다. 거듭난 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내적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베드로전서는 A.D. 64년 네로 황제의 대대적인 박해를 피해 터키의 캄캄한 바위 굴속에 숨어서 힘겹게 신앙을 지켜 나가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편지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박해받는다는 걸 알면서도 예수님을 믿었다. 오늘 북한도 그럴 테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복을 구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어저께 헤이슨과 여의도에서 벚꽃을 구경했다. 부활이 이런 걸까? 길고 긴 겨우내 너무나도 황량해 죽은 게 아닐까 생각됐지만 사실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나 아름답게 활짝 핀 벚꽃. 아마 그 이상이리라.

written by Her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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