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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나눔/Etc (기타)

수원, 어디까지 가봤니?

by hehebubu 2015. 8. 12.

수원의 예비 공무원 및 시민으로서, 수원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알아두면 유익한 정보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1. 심벌마크

 

- 심벌마크의 전체적인 형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의 성곽을 현대적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단순화시켜 표현하였으며, 화성에 있는 건축물 중 시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풍요로움을 지켜주는 의미와 건축의 독창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서북공심돈을 상징적으로 조화시킴으로써 수평과 수직의 조형적 원근감에 의한 심미성과 참신성을 강조함.

- 서북공심돈을 감싸고 펄럭이는 깃발은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시민의 활동성과 미래지향적인 적극성을 상징하며 붓 터치의 표현은 전통이 숨쉬는 예술의 도시임을 나타냄.

- 도형 전체는 수원의 영문이니셜인 'S'와 'W'의 표현으로 세계인의 인지도를 높이고 시민의 미래의 비전을 향해 융합되어 가는 모습이며, 열린 형상은 세계인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수원시민의 품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고, 청색과 녹색은 희망과 풍요 그리고 적색은 수원시민의 정통성과 활동성을 상징함.

 

2. 시목(市木), 시화(市花), 시조(市鳥)

 

▲ 소나무 : 상징인 팔달산 그리고 노송지대에 분포하는 나무로 민족의 기상, 절개, 지조, 장수 등을 상징

 

▲ 진달래 : 수원팔경 중 하나인 화산두견(花山杜鵑)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화산이라는 의미

 

▲ 백로 : 여름철새로서 시의 나무인 소나무와도 잘 어울리며 서호저수지 주변 여기산의 백로 서식지가 유명

 

3. 행정구역도

 

 

4. 관광안내지도

 

http://tour.suwon.go.kr/sw-tour/tour04/tour04-02/tour04-02-01.jsp

여기로 들어가시면 보다 선명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5. 문화유적

 

▲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보물 제14호)
이 비는 창성사에서 운명한 진각국사 천희(千熙, 1307~1385)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우왕 11년(1385)에 만들어졌다. 천희는 13살의 나이에 불교계에 들어섰다.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중국 유학을 결심하여 1364년부터 2년간 원나라에서 선종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국사에 봉해져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고려 말에 활약하였다. 본래 광교산 기슭의 창성사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65년 6월 9일 화성의 방화수류정 옆으로 이전하고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비(총 높이215cm)의 형태는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높이150cm, 폭85cm, 두께13cm)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었다. 비문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짓고, 승려 혜잠(惠岑)이 글씨를 새겼다.

 

▲ 수원 방화수류정(보물 제1709호)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 수원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효과적인 재료 활용을 보여주는 서북공심돈은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 수원 화서문(보물 제403호)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수원 팔달문(보물 제402호)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6. 산

 

광교산(장안구 소재) : 광교산은 수원의 북쪽에서 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며 시가지를 품에 안고 있는 수원의 주산으로 원래 이름은 광악산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광교산은 경부고속도로와 서울~수원간 도로 사이에서 남북으로 약 2km정도에 걸쳐 뻗어있는 산으로 수원시 상광교동에 속해 있다. 산의 능선이 매우 한적하면서도 완만하고 사방에 수목이 우거져 있어 삼림욕을 하거나 당일 코스로 오붓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다. 1994년까지만 하여도 봄(3개월)과 가을(1개월)에는 산불 우려로 전면 입산 통제하였으나, 1995년 가을부터는 주민 휴식공간 제공과 여가선용 기회 확대를 위해 연중개방하고 있으며, 훼손된 등산로변과 자연경관을 산림자연환경 스스로가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03년 2월 1일부터 3년 단위로 단계적으로 광교산 휴식년제를 실시 중이다(2015년 현재 5단계 실시). 광교산을 보존하면서 관광객과 시민에게 산림 휴양과 치유의 산림문화 공간을 제공하고자 2012년에는 수원시 산림자연자원 총조사를 실시하여 훼손된 산림을 복원하고 건강한 숲길을 조성하기 위하여 매년 등산로 정비 및 생태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칠보산(권선구 소재) : 칠보산은 원래 화성군 매송면에 속해 있는 산이었으나 지난 1987년 1월 1일에 수원시로 편입되었다. 해발 238.8m이며 면적이120ha인 이 산은 산능선이 매우 완만하지만 소나무 등 수림이 울창하고 곳곳에 자연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노약자와 여성들의 등산코스로 적당하며 아이들의 자연생태 학습장으로도 적당해 최근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고 있다. 지난 1996년 5월부터 시민들의 양식을 담보로 연중 개방하고 있다. 이 산도 예부터 8개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으나 어느 때인가 한 개의 보물인 금닭(또는 黃鷄)을 누군가가 가져가 칠보산이란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 물에 빠진 금닭을 건져내어 갖고 있다가 도둑들에게 강탈당하자 갑자기 보통 닭으로 변해버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 안산에 사는 부자가 8가지 보물 중 하나인 황계를 가져가 칠보산이 되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그 부자는 큰 부자가 되었다는 설과 벌을 받아 꼽추가 되었다는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나머지 일곱가지 보물에 대한 견해도 각각 다르다. 이곳 주민들의 추측으로는 보물중의 하나는 일제 때 원평리 우씨가 집을 짓던 중 집터에서 발견된 종으로 그것이 당시 8백원을 받고 박물관에 팔았다고 한다. 또 하나는 호매실동의 용화사에 위치한 부처상이라고 하며 나머지 5개는 알 수 없다. 다른 견해는 산삼·맷돌·잣나무·황계수닭·범절·장사·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견해 모두 후에 인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많고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지 않다. 칠보산에는 골짜기마다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피서철이면 많은 시민들이 계곡을 찾고 있으며, 용화사와 무학사 등이 위치하고 있어 평시에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칠보산의 자락인 매송면 천천리 뒷산에는 매곡서원(梅谷書院)터가 있다. 매곡서원은 조선 숙종 20년(1645)에 건립되었으며,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고 있다. 송시열은 조선조 선조~숙종간의 학자로 노론의 영수였으며, 좌의정을 역임했다. 송시열은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추진했으나 효종의 죽음으로 인해 불발로 끝났다.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학자로서 추앙받고 있으며,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어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러나 매곡서원은 지금은 폐허가 되어 주춧돌만 남아 옛날을 되돌이키게 할 뿐이다. 칠보산의 등산로는 화성군 매송면 천천리의 칠보산기도원 입구에서 길을 잡아 기도원→정상→수원 안산 산업도로변 천주교 공동묘지로 가는 길이 있으며, 이를 역으로 회주해도 된다. 또 한 코스는 호매실동 용화사→정상→용화사의 길이 있는데 두 코스 모두 크게 힘들지 않아 가족과 함께 오르기 적합하다. 칠보산에 있는 식물은 모두 39과 138속 163종으로 주요 수종으로 인공식재한 리기다 소나무가 있으며, 소나무·참나무·물갬나무·오리나무·아카시나무·싸리나무·진달래·노간주·팥배나무 등이 있다. 조류로는 17종 34개체가 관찰됐는데 참새·찌르레기·까치·꾀꼬리·노랑턱멧새·뻐꾸기·밀화부리·귀제비와 천연기념물 제324호인 소쩍새와 붉은배새매 및 희귀조인 청호반새도 조사되었다

 

청명산(영통구 소재) : 덕, 하갈, 영통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191.9m의 산으로 황골 동쪽에 있다. ‘청명산’이라는 이름은 이 곳에서 올라보면 사방 삼사십리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탁트인 곳이기 때문에 붙여지게 된 것이라 전한다. 이와는 달리, 옛날에는 군인들이 천명(天命)을 이어가는 유명한 산이라고 해서 ‘천명산(天命山)’ 이라 불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청명산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경기도에서 1987년에 발간한 지명유래집(地名由來執)에는, ‘이 산은 옛날부터 명산이고 수려하다하여 청명산이라 칭하고 ’(865면)있다고 나와 있다. 급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는 이 산은, 옛날부터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뭄이 들때면 이 지방 관리들이 이 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으며, 제를 지내고 나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고 한다. 청명산봉우리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 우물 속에는 보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보물은 영(靈)과 통(通)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청명산 주변의 마을을 ‘영통(靈通)‘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7. 호수공원

 

▲ 만석거(장안구 소재)

 

▲ 일월저수지(권선구 소재)

 

▲ 서호저수지(팔달구 소재)

 

▲ 광교호수공원(영통구 소재)

 

8. 축제

 

 

 

 

9. 인구 1,199,903명(외국인 40,537명)

 

10. 시장

 

염태영

출생 1960년 7월 25일, 경기도 수원

소속 경기도 수원시(시장), 수원르네상스포럼(대표)

학력 서울대학교 농화학 학사

경력 2014.07~ 제27대 경기도 수원시 시장

       2010.07~2014.06 제26대 경기도 수원시 시장

 

11. 민선5·6기시정이미지

 

- 새 : 깨끗한 도시환경 조성으로 자연과 어우러지는 환경도시

- 무한대 : 따뜻한 복지행정과 시민의 참여로 번영하는 소통의 도시

- 별 : 튼튼한 경제로 청년이 꿈을 맘껏 펼치는 희망도시

- 달 : 청렴한 행정과 유비쿼터스 기반 조성으로 신뢰받는 첨단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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